아내와 함께 하늘길을 걸었다. 이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길이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고 바람과 구름이 서로의 빛을 나누는 곳, 강원도 고성의 앞바다 하늘길 위에 서니 일상의 번잡한 생각들이 조금씩 멀어졌다. 바닷바람은 짭조름한 냄새를 머금고 뺨을 스쳤고,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깨웠다. 아내의 옷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나는 우리가 참 먼 길을 함께 왔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가 내게 말했다.
“여보, 나중에 내가 저세상에 갈 때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그 말은 아주 조용히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깊고, 평생 함께 살자는 약속보다 더 아득한 말이었다. 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내의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담겨있었을까. 함께 살아온 날들에 대한 고마움, 남겨질지도 모르는 두려움, 그리고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했으면 하는 간절한 사랑이 그 짧은 한마디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나는 아내와 나란히 걸으며 생각했다. 산골에서 자란 소년은 큰 뜻을 품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있었으며, 가슴속에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그 길에서 나는 때를 묻히기고 했고, 서리를 맞기도 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마음이 무너졌고,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아내는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꿈을 향해 달려갈 때 아내는 내 등을 밀어주었고, 내가 세상과 씨름할 때 아내는 말없이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내가 기쁠 때 함께 웃고, 내가 힘들 때는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었다. 때로는 서로의 마음을 몰라 서운해하기도 했겠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식탁으로 돌아왔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내일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부부의 사랑은 거창한 약속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 식사를 함께 하는 일, 늦은 밤 상대방의 기척을 살피는 일, 아픈 날 곁에 앉아 이마를 짚어주는 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반복했던 하루하루가 모여 한 생애가 되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그 평범했던 날들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젊은 날의 얼굴에는 없던 주름이 생겼고, 한 때 가볍게 오르내리던 길도 이제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우리에게서 가져간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 견디며 얻은 이해가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마음이 있으며, 서로의 부족함까지도 품어주는 너그러움이 생겼다.
젊은 날의 사랑이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이었다면, 노년의 사랑은 서로의 걸음을 기다려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내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내 인생의 수많은 계절을 함께 견뎌온 손이었다. 한때는 젊음으로 빛났고,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이 손을 얼마나 더 오래 잡을 수 있을까. 함께 맞을 아침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뜻대로 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내의 말은 더욱 애틋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서로를 놓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일깨워주는가.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 오래오래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었다. 저 세상까지 함께 가자는 그 말의 뜻을 모으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사랑하고, 그만큼 떨어지기 싫다는 뜻일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아직 걸어야 할 이 세상을 생각했다. 함께 바라볼 노을이 남아 있고, 함께 마실 차 한 잔이 남아 있으며,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여보, 그 길을 생각하기 전에 오늘의 길을 함께 걸음시다. 아침이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햇살 좋은 날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함께 나서고, 저녁이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함께 보냈음에 감사합시다. 내가 당신보다 먼저 지칠 때는 당신이 기다려주고, 당신이 힘들 때는 내가 손을 내밀겠소. 남은 날들이 젊은 날보다 눈부시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만큼은 더욱 깊고 따뜻해지기를 바라오.
고성의 하늘길에서 아내가 건넨 말은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어쩌면 사랑이란 같은 날에 태어나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사랑하고, 먼저 떠난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남긴 온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있다면, 그 소망마저 남은 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우리의 발걸음은 느렸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하늘길은 죽음 이후에만 열리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한 평생을 함께 걷는 길, 서로의 주름을 어루만지고, 서로의 외로움을 덜어주며, 마지막까지 마음을 나누는 그 길이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길이라는 것을...
여보, 당신이 내게 저 세상까지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나는 그 말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들었소. 하지만 나는 오늘도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을 걷고 싶소. 봄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고,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을 밟으러 가고,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에도 당신 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그리고 먼 훗날,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하는 날이 오더라도 서로를 향한 고마움과 사랑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오.
한 평생 함께 걸어온 길이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영원으로 이어지기를...
고성의 앞바다 하늘길에서 나는 아내의 손을 조금 더 꼬옥 잡았다. 푸른 하늘 아래 우리의 남은 날들이 아직 다하지 않은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