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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가이드 전대수의 수필보기 - 나의 자목련

재첩국 2007. 6. 20. 10:38

 한국스피치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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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나의 자목련

 

의연(毅然)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아내를 보면서 자목련(紫木蓮)을 그린다.

정원수로서의 백목련이 세인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야생의 자목련은 나에게 사랑을 준다. 정원의 백목련이 4월의 등불을 밝혀 준다면 잡목만이 무성한 심산의 자목련은 나에게 사랑의 등대가 되어 준다. 백목련이 도시의 화려한 여인이라면 자목련은 산골 외딴 집의 덤덤하고 수수한 아낙이다. 백목련이 화사한 자태를 뽐낸다면 자목련은 은근한 의미를 간직한다. 그러기에 군중 속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백목련보다 심산(深山)의 고고(孤高)함을 갖춘 자목련을 나는 사랑한다.

 

대부분의 꽃은 10대의 청춘이지만, 목련은 40대의 여인인가. 나는 자목련을 대할 때마다 아내와 마주 대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아내와 나는 동부전선에서 군 복무를 할 때부터 5년간의 장거리사랑(?)을 하였다. 그때부터 자목련에 대한 의미는 남달랐다고나 할까.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는 자목련이 많이 피어 있었다. 고산(高山)의 기온 탓으로 늦게 싹을 틔워 늦게까지 꽃을 피우는 나무이다. 잎이 다 진 겨울에도 빨간 꽃씨를 굳은 껍질로 싸안고 모진 찬서리를 견디어 내는 자목련. 그러기에 자목련을 두고 거상화(拒霜花)라고 명명(命名)한 것이 아닌가.

 백목련은 아지랑이 속에서 숭고함을 피워가고, 햇빛이 따스한 만큼 포근하게 꽃봉오리를 틔워가지만, 자목련은 찬 공기 속에서도 향기를 피우고, 발가벗은 나목(裸木)의 곁에서도 싱그럽고 은은함을 보여 주는 꽃이다. 어쩌면 꽃 중의 군자라고나 할까.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만, 유독 그 자목련은 여늬 꽃에 지지 않는 자태(姿態)를 갖추고 있었다.

 

풀벌레도 먼 눈으로 바라보는 자목련, 강건한 줄기와 감잎처럼 질긴 잎으로 버티어 선 자목련, 꽃 이파리도 사랑하는 이의 귓볼인 양 보송보송하여 차마 만지기 두려운 자목련, 꽃봉오리는 풀벌레의 속삭임과 산새들의 노래 소리도 모두어 담는다.

 

하여, 만개한 자목련의 꽃을 대할 때면 권위와 위선은 사그라지고, 숨결이 일렁이곤 하였다. 그러한 자목련이 내 아내이기라도 한 양, 나는 자목련과 대화하고 숨쉬며, 사랑하고 있었다.

 

자목련은 꽃말이 '숭고한 정신'이다. 그렇듯 숭고한 사랑을 안고 있으며, 서럽도록 아름다운 전설을 머금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에게는 비단처럼 곱고 부드러운 얼굴과 마음씨를 가진 공주가 있었다. 모든 남성의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던 공주는 옥황상제의 뜻과 많은 젊은이의 청을 거절하고, 흉악하고 무서운 북쪽 바다의 신을 사랑하였다.

 

어느 날, 공주는 궁(宮)을 빠져 나와 바다의 신을 찾아갔다. 그러나 바다 신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공주에게는 손댈 수 없는 사랑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 한 나머지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북쪽 바다 신은 공주의 시체를 건져 올려 땅에 묻어 주고, 공주의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자기 아내에게 잠자는 약을 먹여 같이 묻어 주었다.

 

옥황상제는 가엾은 두 무덤에서 꽃이 피어나게 하였는데 공주의 무덤에서는 흰 꽃이, 부인의 무덤에서는 자주색 꽃이 피어났다. 그런데 그리움이 많은 공주의 무덤에서 핀 흰 꽃은 봉오리가 모두 북쪽을 향해서 피어오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비무장지대의 잡목들과 어울려 피어난 자목련의 꽃을 보면서 나는 이 전설이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도심(都心)의 주택가 담장이나 정원에 피어오르는 백목련은 해를 향해 꽃피우지만, 심산(深山)의 자목련은 북을 향해 고개 숙여 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북쪽 바다 신은 바닷가의 가난한 어부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공주보다 아내가 남편을 더 사랑하였기에 못다 한 사랑을 그리움으로 꽃피워 북쪽 바닷가 어부를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상상의 비약(飛躍)일까. 나는 또 다른 전설을 만들고 만다.

 

자목련은,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어부를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지쳐서 죽은 아내의 무덤에서 핀 꽃이며, 그것은 아내의 혼(魂)이라고.

 

나는 바다의 신인가, 가난한 어부인가. 나의 아내가 꽃샘추위를 견디는 자목련처럼 5년여의 장거리사랑(?)에도 시들지 않고, 숱한 곡절과 역경에도 꺾이지 않으며, 세파에도 지긋이 견뎌주기에 나는 늘 고마워한다. 끊임없이 속으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가고, 고달픔도 웃어넘기는 나의 아내. 눈물 대신 웃음으로, 울음 대신 노래로 살아주는 자목련 같은 나의 아내. 현실의 아픔을 인고(忍苦)의 껍질로 감싸안고 삶을 사는 것일까. 나의 사랑을 헤아려 허물을 덮어주고, 줄기와 잎이 질겨서 어려움을 견디어주는 것일까. 나는 그런 아내를 가슴에 심은 바다의 신이거나 어부인지도 모른다.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