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사랑방

스피치가이드 전대수의 수필보기 - 귀여운 도둑

재첩국 2007. 6. 20. 11:20

한국스피치교육센터

www.speech114.com

 

수필/ 귀여운 도둑

 

심야에 밤잠을 흔들어 깨우는 벨소리. '책을 훔친 도둑'이라는 자기 고백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여인의 송화(送話), 도둑답지 않은 다감(多感)한 음성의 중년 여인이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나의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욕심이 생겨서 슬며시 가지고 와 보던 중이라며, 저자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가끔 남의 책에 손을 대는 버릇이 있다는 그녀와 나는 책 이야기로 긴 통화를 하다가 끊었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그녀는 분명 도둑이다. 오늘 밤, 어쩌면 그녀는 내 영혼의 일부까지 정탐을 하여 훔쳐간 도둑일지도 모른다.

 

도둑도 여러 질(質)이다. 생계 수단으로 하는 프로페셔널 도둑이 있고, 성취감이나 만족감 내지 쾌감을 취하는 정신 이상에서 비롯된 습관적인 도둑도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돈이나 물건을 훔치는 물질주의 도둑이 있고, 기밀 문서나 정보를 전문으로 하는 도둑도 있다.

 

요즘, 보도에 따르면 권좌를 이용하여 국민의 재산을 빼돌리거나, 정보를 이용하여 이권에 개입을 하고, 업자로부터 검은 돈을 받고 눈감아주어 공사는 부실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선량한 국민이 피해를 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행태로 건 남의 재산에 피해를 준 측이 있다면 그쪽은 분명히 도둑이요, 그런 도둑을 믿고 내 재산을 맡겨 두었으니, 내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가 있었겠는가?

 

간이 작아서 큰 물건은 손대지 못하고 작은 물건에만 매달린 좀도둑은 잘도 잡힌다. 부유층이나 고위층을 상대로 크게 한 탕하여 서민들에게 베풀어주는 의적(義賊)에 버금가는 대도(大盜)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국가의 재산이 온통 제 것인 양 주물러버린 왕대도(王大盜)가 숨 쉬고 있으며, 도둑질 해 모은 재산을 또 도둑맞지 않을까 하여 불안에 떨 것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도둑놈 천국이다 싶기도 하다.

 

허나, 도둑이면서 결코 밉지 않은 귀여운 도둑이 있다. 고가(高價)가 아닌 바에야 책이나 꽃 한 송이 정도 훔친 사람이라면 그다지 밉지 않을 것이다.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쳐먹고 벌을 받는 '장발장'이 지금 그 행각을 한다면 그의 호주머니에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넣어 줄 사람도 많지 않겠는가?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동화에서 선녀의 날개(?)를 훔쳐, 선녀를 아내 삼은 나무꾼이나, 순진한 하동(河東) 처녀의 순결을 훔쳐서 아내로 만든 나의 행위가 도둑질이기는 해도 벌을 받을 도둑은 아닐 거고 ….

 

귀여운 도둑은 참으로 많다. 지하철 차창에 비친 여인의 얼굴을 훔쳐보다 눈길이 마주쳐 얼굴을 붉히는 남성이나, 장거리 열차 여행 중에 옆에 자리한 여인의 옆모습을, 그것도 말 한마디 붙여 볼 용기가 없어서 역시 차창의 거울을 통해 훔쳐 볼 수밖에 없는 그런 도둑질은 귀엽게 봐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책을 훔쳤다고 익살스럽게 고백하는 그 여인을 처벌할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언젠가, 장인어른께서 딸을 도둑맞고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자네, 도둑놈 아닌가" 하셨지만, 혼인하여 아들 딸 낳고, 사랑하며 살고 있으니 어느 법률이 날 구속할 것인가?  지금도 나는 귀여운 도둑들을 생각하면서 잠자는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으며, 이것이 사랑인 것을.

 에라, 기왕 도둑질 한 김에 잠든 아내 한 번 몰래 껴안아 봐야겠다.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