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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가이드 전대수의 수필보기 - 어머니의 반짇고리

재첩국 2007. 6. 20. 11:26

 한국스피치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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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머니의 반짇고리

 

 

모처럼 일요일을 한가로이 맞았다. 분주한 도회지 생활 중에서 한가롭다는 것은 비 온 뒤의 청결하고 싱그러운 정경 같다고나 할까?

 

옛것을 잊고 새것만을 찾으면서 살아왔고, 조상이나 고향도 잊으며 살아왔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왔다. 그러던 중에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얻었으니, 풀 내음이 싱그러운 교외나 갈까하고 옷가지를 골랐다.

 

 입고 나갈 의복을 고르다가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바느질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유별나게 무릎으로 기기를 즐기는 막내아이의 옷을 깊고 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반짇고리를 볼 수 있었다.

 

아내의 반짇고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네모난 상자이다. 굳이 이름하여 반짇고리이지만, 그것은 열을 가하여 만든 합성상자일 뿐이다. 그 상자에는 크고 작은 바늘과 여러 가지 색 실타래가 들어있고, 어울리지 않는 병따개나 고지서 그리고 영수증도 들어있다. 어린 시절에 본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대나무 소쿠리였다. 섬세하게 엮어 만든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역시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낡은 대오리가 헐어서 넘쳐 나올 만큼 많이 담겨 있었다. 누에고치에서 뽑아 만든 명주실, 목화를 타서 물레로 잣은 무명실, 수의(壽衣)를 짓고 남은 삼베의 천 조각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 엄지손가락에 꼭 끼이는 누에고치를 잘라서 만든 골무, 천 조각을 넣어서 뭉친 바늘겨레, 은박지로 납작하게 눌러 싼 바늘쌈도 그 속에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뽕잎이 한두 잎 걸쳐 있기도 하였고, 말갛게 살찐 누에가 꿈틀거리며, 검고 작은 똥을 누어 놓기도 하였다. 읍내에서 사 온 바늘쌈 외에는 어머니의 손길과 정성이 담긴 것들만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인고의 세월을 담고 있었다.

 

 베틀 밑이나 방의 윗목이 주거지였던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가끔 선반에 얹히기도 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베를 짜듯 인생을 엮으시고,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듯 세월을 뽑아 내셨다. 아버지가 일구어 주신 밭이랑에서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그리고 뽕을 따다가 누에를 치고, 목화를 탄 솜에 물레를 잣고, 손톱으로 삼 껍질을 가늘게 가르고, 그러면서 5남매를 길러 주셨다.

 

 인공위성이 달나라에 가는 것쯤은 별 관심사가 못되셨다. 오직 '살림살이'가 직업이었으며, 직업인으로써도 만능이셨던 나의 어머니는 기능과 예능과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베틀에 앉아서 베틀신을 신고, 베틀 끈을 당기면 북이 지나가도록 수십 개의 올이 위 아래로 열리고, '딸깍' 소리와 함께 용두머리 눈썹대와 반대 방향으로 맞추어진 굽은 신찐나무가 움직이면 운명을 짜고 인생을 엮으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재능과 예능은 끝이 없었다. 손수 짜신 천에 마음먹은 색깔의 물을 들이는 솜씨는 어느 염색 공장의 기술자도 따를 수 없었을 것이며, 옷을 지으실 때의 디자인과 재단 솜씨나 바느질 솜씨도 재능을 넘어선 예능이었다.

 

쉰 넷의 나이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한을 받아들여 가슴에 안고 사셨다.

 아버님의 상(喪)을 치르던 날, 어머니가 짜신 천은 조기(弔祺)와 명정(銘旌)이 되었으며, 대나무에 묶이어 앞마당에 줄지어 꽂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 조기와 명정을 붙들어 잡고 있었다.

"그 조기는 내가 들고 갈 거야. 우리 아부지 죽었으니까."

철없던 나의 말이었다.

 

 그후, 어머니는 베를 짜거나 길쌈을 하실 때도 그랬지만 반짇고리를 앞에 하실 때면 '철없는 막둥이, 지 아부지 죽었는디......'하고 혼잣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마도 내가 어머니의 한을 알게 된 것은 그 때부터였으리라.

 

어머니의 반짇고리에는 운명과 인생 그리고 세월이 담겨있다는 것도 그때부터 알게 되었으리라.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반짇고리는 한동안 어머니 방에 있었다. 가끔 가는 고향집이지만, 어머니의 방에서 반짇고리를 보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았으나 언제부터인가 볼 수가 없었는데 오늘 나는 아내의 반짇고리에서 어머니를 찾은 것이다. 비록 대나무 소쿠리가 아니고, 어머니의 것은 담겨 있지 않았으나 어머니를 생각게 하는 힘이 담겨져 있었나보다.

 

가끔 꿈속에서만 뵐 수 있는 어머니. 나는 오늘 반짇고리에서 어머니의 영혼을 보았다. 문명의 발달은 사회를 복잡하게 만들며, 옛것을 잊게 만든다. '기운 옷은 입지 않겠다.'는 나의 막내아이는 먼 훗날 제 어머니의 반짇고리를 생각하고, 제 어머니의 영혼을 더듬어 낼 수 있을까?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