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피치교육센터
수필/ 결혼 공약
불혹(不惑)의 나이에 결혼식 주례를 선다. 거개가 사양하다가 맡아 서게 된 것이나, 성스러운 식전에서 엄숙한 가운데 진지하게 혼인 서약을 하며 성혼을 선언한다. 자연과 우주와 모든 인류의 뜻을 모아서 축복을 전하고, 결혼과 인생을 역설한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내 자신을 떠올리게한다.
결혼 생활 10여 년, 그간 두 딸과 한 아들을 얻었고, 인생을 성숙기로 끌어 올렸지만, 아내와의 결혼공약(結婚空約)은 공약(空約)으로 변하고 허공에 떠 버렸다.
내 아내는 결혼 전의 약속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의 서약을 기억할 것이며, 남달리 많은 약속을 늘어놓았던 나였으므로 그것들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 손이 거칠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진 아내가 나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면 나는 지난날의 약속들을 생각하며 미심쩍은 미소를 띌 뿐이다.
태초에 '아담'이 약속을 어긴 탓에 나 또한 어긴 것인가? 빛나고, 아름다우며, 찬란한 미래를 장담하여 선뜻선뜻 주어버린 나의 언약들이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약속은 달걀과 같은 것이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리라. 수없이 부셔지고 깨져버릴 약속을 나는 왜 하였으며, 내 아내는 또 그것을 왜 믿었을까?
주례를 맡을 때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심신을 정결하게 가다듬고, 때때로 아내는 '간절한 주례사'를 당부하기도 한다. 행복을 향해서 길을 떠나는 신혼부부에게 줄 나침반이 없거든 축복만을 주라는 뜻일 게다. 깔끔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입혀 주며 마주 선 아내가 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당부를 할 때면,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라는 욕구 같기도 하여 나의 시선은 방황을 한다. 내가 주례사를 할 때, 신랑과 신부로부터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 할 부부가 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며, 행복을 보장받는 비결이라도 일러주듯 좋은 말만 골라서 역설해 대는 것을 아는 것 같아서 아내 앞에서 재빨리 시선을 피하곤 한다. 그리고 나의 주례사는 언제나 가면을 쓰고 읊어지기만 한다.
아내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을 뿐,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세월의 무게에 눌리어 망각이 되고, 일부는 좌절에 찢기어 갈 것이나 남은 것은 기대 끝에 원망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한강변을 아내와 함께 걸으며 결혼 전의 약속들을 생각해 보고 실행을 다짐해 보지만, 끝내 나는 공상가일 뿐 실천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만다.
행복 …….
내 아내에게 약속했던 행복을 보장해 주었는가? 나의 권리를 양도하고 아내의 뜻만을 따르며, 행복을 보장해 주겠다던 내가 남편의 권위를 내 세우고, 그리하여 아직 이른 나이에 손이 거칠어지게 하였으며, 얼굴에 우수가 어리게 만들고 말았지 않은가.
사랑 …….
아내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던 내가 아내에게 모든 것을 받기만 하지 않았는가. 입덧을 하는 아내가 호떡하나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모르고 넘어갔던 나의 무관심과, 빨랫감 쌓이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아들 딸 셋을 낳도록 한 나의 방종과, 깊은 밤을 뜬눈으로 지키게 했던 나의 태만이 아내의 사랑 앞에 새삼 부끄럽다.
아내의 아침인사는 '일찍 들어오세요.'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여서 아내는 기다림에 지치는 날이 다반사였다.
지난 해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딱 한 잔만 마시자는 것이 2차, 3차를 거듭하고, 그렇게 하여 건강을 해질 것을 염려한 아내가 일찍 들어오라는 아침 인사를 하였으나 그날의 인사말은 바가지를 긁는 것 같았다. 출근을 하다 말고, 집으로 되돌아가 방에 벌렁 눕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가 추궁해 대자, "일찍 들어오라고 했잖아!"하고 쏘아 붙였던 일이 있었다. 당나귀 같은 내 심보를 알아낸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12시안에만 돌아오라.'고 시간까지 정해 주었으나 끝내 그 시간마저 지켜 주지 못했다.
아내는 자신을 위해서 나와의 약속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우선, 남편을 위해서이고, 그 다음이 둘의 행복을 위해서 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행복이 넘쳐나면 자식들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을 인생의 체험에서 얻어낸 것이다.
아내와의 결혼 공약은 대부분 공약(空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지켜야 할 공약은 있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이제부터는 지키리라. 너무 많은 약속을 늘어놓고, 호언하던 나에게 '모두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 아내에게 '물론 그렇다'고 하며, '지켜지지 않을 약속은 뭐하려고 하느냐.'고 외려 큰소리 쳤으나 그것이 가장 큰 공약(空約)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약속은 정신적 부채이다.. 지금까지의 부채는 아내의 망각과 좌절에 따라서 탕감이 되었다 해도 더 이상의 부채를 지지 않고 싶다. 내 마음으로 아내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고, 내 눈으로 아내의 가슴을 녹여 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아내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다.
허전하게 텅 빈 마음을 싫어하는 아내. 가슴이 차가운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아내를 위하여 언제나 마음을 채워 주고, 가슴을 녹여 주리라. 어깨 뿐 아니라, 심신 전체를 포근히 감싸주는 사랑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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