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피치교육센터
수필/ 눈발을 가르며
설날을 며칠 앞두고 눈이 내린다. 보송보송한 눈발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일요일 아침의 고속도로는 한가롭기만 하다.
눈이 내리는 날은 언제나 주위가 조용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눈송이의 약 90%가 공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눈송이가 방음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난히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H형 내외와 함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향림원(香林院)에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같은 동네 사는 H형은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한 형편이 못된다. 그러나 마음만은 넉넉하여 언제나 이웃을 생각하며 사는 봉사자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세상 인심도 갈수록 야박해진다고 세태 탓은 하면서도 성큼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형은 그렇지 않다. 동네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가족이요, 먼 곳에 사는 사람도 이웃이다. 그래서 그 형은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취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H형은 봉사 활동하는 것을 보람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 형의 주업은 음식업이지만, 식당의 한 켠을 이용하여 꽃가게도 겸하고 있다. ‘정든길’ 입구에 있는 ‘예아네’에 가면 언제나 동네 사람들로 북적인다. ‘예아네식당’은 언제나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물씬거리고, 삼겹살 익는 소리가 지글거린다. H형 내외는 털푸덕거리며 분주하게 식당의 손님맞이를 한다. 그러다가도 꽃을 사러 오는 손님이 있을 때는 재빠르게 쪽문으로 꽃가게에 들어서서 꽃을 팔기도 한다. 그러니 ‘식당 수입에 꽃가게 수입까지 더하면 꽤나 짭짤하지 않겠는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리라.
그러나 실상을 보면 제돈 내고 먹는 손님보다 공짜로 대접받는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모아놓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다고 단언을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H형은 돈벌어서 배를 두드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의 등을 두들겨주며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 형이 얼마 전에 ‘이웃사랑’ 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하기에 나도 동참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글쎄,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하는 염려 절반에 ‘나부터 정성을 다하면 되겠지’하는 마음 절반으로 시작을 하였는데 회원의 수가 제법 많아졌다. 그리고 회원들 중에는 성금을 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신발공장을 하는 사람은 신발을 내놓고, 옆 동네 상원 쪽에 사는 친구는 식빵을 한 상자 가져오기도 한다.
이처럼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하여 향림원을 찾아가는 길에 H형 내외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앉아야 할 승용차의 시트에는 원아들에게 나누어줄 신발 상자며 간식거리가 차지하고 앉아 있다. 포근하게 내리는 눈발을 가르며 운전석에 앉은 형은 시종 콧노래를 부르고, 선물더미에 뒤섞여 뒷좌석에 않은 형수는 작년에 다녀온 고아원 이야기에 열중이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틈틈이 ‘그렇군요’하고 양념(?)만 치면서 달리는 차 중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식당 주인의 금고가 텅 빈 대신, 봉사자의 주위에는 사랑이 많구나. 돼지갈비를 팔면서도 계산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돼지 갈비에 사랑을 입히는 H형! 모든 이웃에게 사랑의 옷을 입힐 줄 아는 마음을 가진 H형이야말로 진실한 생활인이며, 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진실한 봉사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중부고속도로를 달려가니 곤지암이 나오고, 그곳에서 양평쪽으로 국도를 따라 5분 여를 달리니, ‘향림원’의 작은 표지판이 안내를 한다.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 좌측 산속으로 살짝 돌아드니 그곳이 바로 장애아들의 삶터 향림원이다.
미리 전화로 통보를 해둔 터라 원장님과 직원들이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와 있다.
가지고 간 선물꾸러미보다는 찾아간 손님을 반기는 원아들을 보면 ‘여기가 바로 인간 세상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선물꾸러미를 살피는 직원들의 분주한 모습을 보면 ‘인간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산2번지에 있는 향림원을 나는 이 지구상에 하나 남은 ‘인간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향림원은 사회복지법인으로 1953년에 창설하여 반세기 동안 중증장애인들을 돌봐온 인간 세상이다. 어느 한 부분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서 외면을 당한 아이들, 그들은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회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직, 갖추어진 시설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언제나 삶에 감사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면 홀로 설 그날을 만드는 것이다.
200여 명의 아버지로 원아들의 요양과 재활 교육을 위해서 잠바를 걸쳐 입은 원장 선생님을 보면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엿볼 수 있다. 생후 2개월 된 아동부터 요양이 가능한 유아들의 방에 들어서면 힘겨운 몸놀림을 보게 되고, 네 살 이상으로 재활의 꿈을 일구는 재활원에 들어서면 보살핌과 가르침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그도 그 때뿐 ‘떠나면 그만’이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모처럼 시간을 얻어 간 길이니 정이나 듬뿍 주자는 생각에서 장애아들과 악수를 하고 스킨십을 시도해 보지만, 이런 나의 행동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얼굴을 붉히고 만다. 그래도 아이들은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목에 매달리고, 말을 걸며 마냥 반가워하기만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이제는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다. 다음에 또 오라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재활원의 문을 나서는데 스므 살 가까이된 처녀가 친숙한 말투로 인사말을 건넨다.
“또 와! 여름에 와!”
나는 위문 행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름에 또 오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왜 자주 오라거나 봄에 오라고 하지 않고 ‘여름에 또 오라’고 했을까?
재활의 교육에 따라 어느 정도 판단 능력을 갖춘 처녀이니 ‘여름철에 피서를 가려면 숲이 있는 향림원으로 와서 쉬었다 가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몰라서 하는 생각일 뿐이었다. 실인 즉, 겨울철에는 그래도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름철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약해지고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우니 ‘그때 와주면 좋겠다‘는 솔직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향림원을 나서는데 또 하얀 눈발이 날린다. 눈발을 가르는 차 중에서 돌아보니 직원들과 원아들의 눈인사에서 향림의 향기가 물씬거린다. ‘여름에나 또 한 번 가봐야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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