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사랑방

스피치가이드 전대수의 수필보기 - 너는 고향이 어디냐?

재첩국 2007. 6. 20. 10:06

 한국스피치교육센터

www.speech114.com

 

수필/ 너는 고향이 어디냐?


내가 성동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30여 년 전이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의 의미에 따라 서울 사람이 되었고, 제법 큰 포부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응봉동 산꼭대기에는 임자 없는 땅에 새끼줄을 쳐놓고, 벽돌을 찍으며 사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일의 소득보다는 땅의 소유권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네의 허름한 방 한 칸을 전세 내어 둥지를 틀게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는 물지게를 지고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다 밥을 짓곤 하였다.

 

겨울철에는 한강 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도 매서웠거니와 빙판길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날씨가 따뜻해지면 자주 가고싶은 곳이 돌계단 아래 수돗가였다. 그리 세련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미모지만, 시골 동생 같은 동네 처녀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서울 물이 덜 들고, 길눈마저 어두운 몸으로 잡지사 기자로 입사하였는데 고작 광고 수당으로 입에 밥풀칠을 하고, 어쩌다 한 번씩 탐방 기사를 올리는 것으로 ‘나도 기자다’하고 체면치레를 하는 정도였다.

 

출퇴근하는 길목에는 연탄가게며, 식품점이 있고, 이발소가 하나 있었는데 나에게 가장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나와 동향인 전라도 출신의 이발소 주인이었다. 한가한 날에는 손님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아 넋두리를 늘어놓았는데 그는 말하는 쪽이었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그가 처음 상경을 하였을 때, ‘전라도 사람이라고 하여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푸대접을 받았다’는 체험담을 자주 들려주며,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인지를 잘 따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발소 주인은 나에게 ‘그래도 비굴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서울이지만, 그래도 응봉동은 내 꿈을 살찌우기에 충분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눈앞에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줄기는 내 몸 속의 혈맥과도 같았다. 그리고 멀리 정좌를 하고 앉아있는 아차산은 성동 땅을 내 품에 안기게 하는 넉넉함을 주고 있었다.

 

그럭저럭 성동에 뿌리를 내리며 살다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서너 해를 떠나 있게 되었는데 제대 후에 다시 찾은 곳이 또한 성동이니, 성동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은 곳도 응봉동이다. 왕십리의 도선동 쪽에 산부인과가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출산을 위해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대폿집에서 술에 젖어 있었다.

 

그로 하여 나는 아내로부터 원망을 종종 들으며 살게 되었는데‘ 마누라의 산고를 외면하는 그런 남편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사건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라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을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 왕십리를 지날라치면 그 산부인과로 눈길이 가고, 그래서 아이에게 ‘네 탯줄을 자른 곳이 저기 있는 P산부인과다’라고 일러주곤 했었다.

 

그런데 큰딸아이가 서너 살 때쯤이었던가. 한 번은 동네 어른이 서로간의 출생지를 묻던 중에 ‘너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아이에게 묻자, ‘P산부인과요’라고 대답하지 않은가.

 

그래,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인생은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이웃 간에 어우러져 살고 있는 것을...

 

지금의 응봉동은 옛날의 응봉동이 아니다. 응봉동의 골목길이 사라진지 오래요, 허름한 집들도 이젠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적당히 보상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으며, 민간 업자들에 의해 아파트 숲이 들어서 있다.

 

벽돌을 찍으며 살던 사람들은 집 한 채쯤 마련하여 옆 동네에 살고 있거나 아마도 이승을 떠난 사람도 있으리라. 수돗가에서 눈길 주던 동네 처녀는 냇물 건너 뚝섬 총각과 결혼하여 지금은 내 옆집에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고향 사람이라고 반기며 내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소 주인은 지금쯤 이웃 간에 싹터있는 불신의 잡초를 깎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의 응봉동 사람들은 출생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런 저런 봉사단체를 만들고,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응봉산 개나리 축제’가 펼쳐질 때면 동네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즐기지 않는가.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