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피치교육센터
수필/ 빚잔치
사업을 하던 친구가 빚잔치를 해야겠다며 도움을 청해 왔다. 패기만만하던 그였으나, 사업체가 무너지고 채권자들에게 몰리니,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 마냥 연신 두리번거리기만 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내 처지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해 보았으나, 막막하기는 매양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차에 어렵지 않은 부탁을 해 왔다. 채권자들을 불러모아 남은 재산을 가지고 청산을 할 터인즉, '채무대리인'을 맡으면 된다면서 큼직한 직함까지 붙여주었으니, 뭐 그리 힘들 것도,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그와 나는 대강의 각본을 짜고, 날짜를 정한 다음에 헤어졌다. 내 사무실 문을 나서며 허둥대다가 얼떨결에 깍듯이 인사까지 하고 돌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게 바로, 몇 년 전의 내 모습이구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는 수년 전의 내 처지를 더듬어 보게 되었다.
사업을 하던 친구는 그래도 빚잔치 할 잔칫거리라도 있지만, 나는 도박이나 다를 바 없는 국회의원 선거에 실패를 하고 얻은 빚더미야말로 힘에 버거워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골목길에서 주민을 만나기라도 하면 '저 사람이 혹시 빚쟁이가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얼굴 들기가 힘들었으나, 무엇보다도 숨막히는 것은 빚 독촉 전화를 받는 일이었다.
한 사람에게 진 빚이라면 그나마 덜 복잡할 터이나,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한다'고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 빚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빠져나갈 틈도 없었다.
일가친척과 통화는 하고 살아야 하련만, 이놈의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괴롭혔다. 그렇다고 전화 없는 생활을 할 수는 없는 일.
밤낮없이 앉아서 당하다가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비상수단을 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나 없다고 그래."하며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써먹다 보면 들통 나기 일쑤요, 철모르는 막내 녀석이 받을 때는 되려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음에랴.
"너희 아빠 집에 있느냐?"하고 물으면 "우리 아빠가 없다고 그러랬어요."하고 오히려 '신고'를 해 버리니, 그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모를 게다.
다급하다 싶으면 방법이 또 없는 것은 아니다. 허튼 소리 몇 마디 늘어놓고, '몇 개월 후면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큰돈이 들어오게 되니, 그때까지만 참아 달라'며 엄살 반, 큰소리 반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수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외출을 할 때면 양복을 빼 입고 택시를 타고 다니는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옛날의 거지는 허름할수록 밥 빌기가 수월했지만, 현대사회는 깔끔하지 않으면 밥이 있는 곳에 출입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요, 남루한 옷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면 '저 사람 패가망신했구나'하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서이다.
아무튼, 집에서는 라면을 먹더라도 커피는 호텔에서 마시며, 땟거리가 없어서 굶더라도 이쑤시개는 물고 다니는 속 빈 강정이 아닌가.
이런 나에게 "신수가 훤하십니다."하는 인사를 하는 사람을 때때로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땐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부채는 갚아야 한다. 놀음 빚과 선거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친지들에게 꾼 돈이니 갚아주지 않고 배겨내겠는가.
빚두루마기 신세가 되어 보라. 빚쟁이도 각양각색이다. 말로는 통하지 않는 끈질긴 빚쟁이, 인간미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고리 채권자, 남에게 인심 쓰며 돈 빌려주고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빚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더 빌려준 빚쟁이도 있다.
이런 빚쟁이들인데 어느 쪽을 갚지 않으며, 어찌 빚잔치를 한다거나 빚 탕감을 하랴.
열심히 벌어서 갚아내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힘에 버거울 때는 공연히 빚쟁이를 원망하고, 속으로 욕하기도 한두 번이 아닌데, '빚 주고 뺨 맞는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이리라.
날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면 때로는 도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원고뭉치를 싸 짊어지고 떠나면 한 달 간이나 달포쯤 작정을 하여 책 쓰는 작업에 몰입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가난한 친척들의 부채를 갚을 필요가 없었다면 예술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하였거늘, 나도 빚을 청산할 몇 년 동안에 십여 권의 책을 펴냈으니, 그나 나나 피차일반으로 고뇌하며 빚을 갚고도 얻은 것이 있지 않은가.
적당히 빚지고 사는 인생, 그것이 잘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빚 걱정 대신에 다른 큰 걱정거리가 생길 테니까. 인생은 누구나 물질의 부채가 아니면 정신적인 부채라도 남기고 가는 것. 나는 적당히 빚지고, 적당히 빚놓고 살리라.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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